중종이 안당(安瑭)을 이조 판서로 삼자, 개연(慨然)하여 서로 다투는 버릇을 통렬히 개혁하여 정승들의 청탁하는 편지도 일체 따르지 않고 재주에 따라서 벼슬을 주었으며, 자급에 구애하지 않고 무릇 효행(孝行)으로 공천(公薦)된 사람이면 그 행실을 열거하여 벼슬에 추천하였다. 또 건의(建議)하여 을해년 아뢰기를, "경술(經術)에 밝고 행의(行義)가 있는 선비를 만일 자급에 따라서 통례대로 말직(末職)에 임명하면 사림(士林)들을 권장하고 격려하기에 부족하니, 6품직을 제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박훈(朴薰) 등에게 특별히 6품을 제수하고, 김안국(金安國), 김정(金淨), 송흠(宋欽), 반석평(潘碩枰)을 또한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 올려 썼다. 또 구언(求言)을 해놓고서 일을 말한 사람을 죄 주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 옳지 않다고 힘써 아뢰니, 임금이 법 밖의 일을 건의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자, 대간이 나라를 그르친다고 논박했으며, 정승들도 자기들의 청탁을 듣지 않는다고 미워하였으나, 안당은 태연히 꺾이지 않고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선양하여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을해년 이후에 이장곤(李長坤), 신상(申鏛)이 계속해서 이조를 맡아 기묘년에 현명과 임금과 충량(忠良)한 신하가 서로 만나는 기회를 열었다. 《기묘당적보》 ○ 당시 정광필(鄭光弼)이 영상이 되고 신용개(申用漑)가 좌상이 되며 김응기(金應箕)가 우상이 되었는데, 무인년(1518) 봄에 김응기가 논박을 당해 사직했다. ○ 무인년 여름에 의논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해서 가을에 서울과 지방에 있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여, 기묘년 4월에 김식(金湜) 등 28명을 시취(試取)하였다. 아래의 <현량과>에 상세하다. ○ 무인년에 김응기가 정승을 사면한 뒤에 자리가 오래도록 비었다. 어느날 후임을 뽑을 것을 명하니, 영상과 좌상이 모두 찬성 김전(金詮)을 천거하였다. 조금 있다가 승지 문근(文瑾)이 널리 의논하자고 청하여 정부와 육조와 한성부와 대간과 시종들을 크게 모아놓고 각각 천거하라 하였다. 육조와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의논해야하지, 정승을 천거하는 일이 어찌 서료(庶僚)한테서 나오는 것이 옳겠습니까" 성종이 일찍이 정승을 두고자 조참(朝參)에 입시한 정승들에게 의논하니, 그때 허종(許琮)이 정승으로 있었는데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삼공으로 정승을 정함에 있어 신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지 아래로 육조에 미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성종이 사과하고 마침내 그 말을 들었으니, 이것이 조조(祖宗)의 고사입니다. 하고, 이로써 굳이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고 물러갔다. 이에 정광필과 신용개 두 정승이 찬성 이계맹(李繼孟)과 판서 남곤(南袞)을 더 천거해 들여보니, 상이 특별히 이조 판서 안당(安瑭)의 이름으로 의견을 묻자, 시종들이 비밀리 찬성해서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5월 15일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친히 정사를 보는데 이조 판서 안당을 즉석에서 정승으로 임명하고, 이장곤(李長坤)을 이조 판서 후임으로 삼고, 김정(金淨)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한충(韓忠)을 응교에 올리고, 김구(金絿)를 이조 정랑으로 삼으니, 모두 임금의 뜻이었다. 이 날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고 땅이 움직이고 뛰며 대궐이 흔들리기를 마치 조그만 배가 바람과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으니, 사람과 말이 놀라 엎어지고 성과 집들이 무너지고 헐리며, 혹은 그쳤다가 혹은 계속되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서 마당으로 나가 피했다. 그 뒤에 지진의 위세는 차차 줄었으나 날마다 지진이 나지 않는 날이 없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쳤는데, 온 나라에서 모두 그러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복상(卜相)한 일은 아래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와 다르다. ○ 회령(會寧) 성 밑에 사는 야인(野人) 속고내(束古乃)는, 겉으로는 우리 나라에게 붙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가만히 깊은 곳에 사는 야인들과 내통하여 공모해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백성과 가축을 많이 사로잡아 갔다. 변장이 속고내의 소행인 줄 알고 급히 임금께 장계를 올려 장차 잡으려 하였는데, 도망쳐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왕래하였다. 무인년에 남병사(南兵使)가 비밀히 아뢰기를,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숨어서 왕래하면서 고기를 잡고 사냥질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서 잡기 어려우니, 불시에 군사를 풀어 잡게 하소서." 하니, 삼공과 병조와 변방에 대해 아는 정승들을 불러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이 자를 응징하지 않으면 성 밑에 사는 야인들이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뒤에는 바로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속히 변방에 관해 잘 아는 중신과 병사를 보내서 조치해서 사로잡아 법대로 다스려 뒤에 오는 자들을 경계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먼저 본도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와 갑옷과 기계를 보내고, 이지방(李之芳)을 명하여 보내면서 특별히 임금의 의복과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그날 바로 하직하고 떠나는데 임금이 선정전에 나와 앉아 소대(召對)하고 이어 전별 잔치를 베풀었다. 삼공과 여러 신하가 좌우에 입시하였는데 내시가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趙光祖)가 와서 입대(入對)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즉시 윤허하였다. 조광조가 들어와서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요 바르지 않으니, 왕자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로 벽을 뚫고 울을 넘는 좀도둑의 같은데, 당당한 거룩한 조정에서 일개 요사스럽고 추한 오랑캐 때문에 감히 도적의 꾀를 행하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는 줄을 알지 못하니, 신은 속으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니, 이에 상이 즉시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보내지 않기로 하자, 좌우에서 다투어 나와 아뢰기를, "병법에는 기(奇)와 정(正)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가 있으니, 형편에 따라 알맞게 일을 처리해야지 한가지를 고집하여 논의할 것이 아닙니다. 책략을 물음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같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단박에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이 나와 아뢰기를, 밭가는 것은 사내종에게 묻고 베 짜는 것은 계집종에게 물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은 어려서부터 북쪽에 출입하여 이제 머리가 희었으니, 변방을 방비하는 일과 저 오랑캐들의 실정에 대해 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신의 말을 들으소서. 사정 모르는 선비들의 말이란 예로부터 이와 같아서 비록 이치에 가까운 것 같으나 사세가 그 말을 모두 쫓기 어렵습니다. 조정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경솔히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이 그래도 듣지 않자, 정승들이 모두 불평을 품고 물러났다. 조광조는 관원으로서 몇 마디 말로써 능히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의논을 중지시키니, 사람들이 모두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사재척언》
8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다. 부제학 조광조 등이 상소하기를, "소격서의 설치는 근거 없고 허황된 것으로, 왕정(王政)에 있어서 배척하고 막아야 할 일입니다. 지난날 고려 말에 교화가 밝지 않아 사람들이 이교(異敎)에 빠져들었던 것이 그대로 잘못을 답습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경외하고 학문에 힘쓰시어 잘못된 것을 억누르고 바른 도를 부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오셨는데, 유독 이 한 가지 일만은 혁파하려다가 다시 의심하시니, 강건하고 순수한 덕을 크게 잃으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혁파하지 못한다." 하였다. 며칠 후에 특별히 혁파하도록 명하고, 사우(祠宇)는 공해(公廨)로 쓰도록 하였으며, 동기(銅器)는 주자소(鑄字所)로 이송하게 하였다. ○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로 삼았다가 곧 파직하고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섬기는 척하면서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여러 야인 부락들과 몰래 모의하고 결탁하여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당수 잡아가지고 갔다. 변장(邊將)이 체포하려고 하자 속고내가 이름을 바꾸고 남도(南道)에 출몰하였다. 병사(兵使)가 군대를 내어 불시에 체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삼공 및 지변 재상(知邊宰相)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지금 통절히 징계하지 않으면 후에 장차 더욱 날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지방을 파견하기로 하고, 또 본도에 비밀리에 하유하여 몰래 군사와 무기를 보내어 불시에 체포하게 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이지방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궁시(弓矢)와 갑옷을 하사하였다. 장수와 재상,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둘러싼 채 시위하고 있을 적에 부제학 조광조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옳지 못한 속임수로써,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어찌 당당한 조정에서 볼품 없는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둑과 같은 계책을 쓴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이에 상이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고 보내지 않았다. 좌우가 번갈아가며 간하기를, "병법(兵法)에는 기발한 방법과 바른 방법이 있으며, 적을 막는 데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일치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을 가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하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문(北門)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정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정에 어두운 저 유자(儒者)의 말은 예로부터 이러했으니, 지금 묘당의 방침이 이미 정해진 마당에 갑자기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고 이지방이 가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조광조가 높지 않은 지위에 있으면서 한마디 말로 상을 움직여 이미 결정한 조정의 큰 논의를 중지시켰으므로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불평하는 마음을 품었고, 그 때문에 반목하게 되었다.
○ 2월. 직접 적전(籍田)을 갈았다. ○ 3월. 상이 선성(先聖)에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유생들을 시취(試取) 하였다. ○ 8월. 성세창(成世昌)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사로잡은 왜노(倭奴)를 바쳤다. 왜노 등원중림(藤原中林) 등이 중국의 영파부(寧波府)에 노략질하여 변장을 살해하고 민간을 약탈한 후에 표류하여 황해도 경내에 이르렀는데, 수신(守臣)이 포획하여 보고하였다. 상이 성세창을 파견하여 포로와 수급(首級)을 바치고 잡혀온 한인(漢人)들을 함께 돌려보냈다. 중국 조정의 신하 이승훈(李承勛)이 상소하기를, "어제 조선 국왕이 아뢴 내용을 보건대, 왜노가 상국(上國)에 쳐들어가서 관병(官兵)을 살해하기까지 하고도 하늘의 주벌을 받지 않고 살기를 도모하여 저희 나라 국경으로 들어왔는데, 황제 폐하의 신령함에 힘입어 모조리 죽여 없앴습니다. 사로잡은 적의 우두머리 두 놈과 수급 33과(顆) 및 장전(長箭), 선창(船牕) 등 물건을 형조 참판 성세창을 차견하여 싸 보내며, 아울러 잡혀갔다 돌아온 왕양(王漾) 등 8명을 관하(關下)에 바치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얼굴이 달아올랐으며,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칙서를 내려 칭찬하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 12월. 평안도 절도사 이지방(李之芳) 등에게 명하여 여연(閭延)의 야인(野人)을 내쫓게 하였다. 이에 앞서 야인 김아(金阿), 송가(宋可) 등이 부령(富寧)으로부터 여연, 무창(茂昌)으로 옮겨와 살면서 땅을 개간하고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되었다. 변신(邊臣)이 군사를 내어 내쫓기를 청하자 상이 조정 신하에게 논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비변사 당상 고형산(高荊山) 등이 일찌감치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상이 경차관(敬差官) 이환(李芄) 등을 파견하여 가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오도록 하였는데, 이환 등이 돌아와 변신이 말한 대로 아뢰었다. 마침내 함경도 순변사 조윤손(曺潤孫), 관찰사 허굉(許硡), 남도 절도사 반석평(潘碩枰),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金克成) 및 이지방 등에게 하유하기를, "주성합(主成哈) 등이 일찍이 우리에게 귀순하였으므로 무창의 강 건너편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여 국가의 울타리로 삼았는데, 저 오랑캐가 우리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다른 종족들을 끌어들여 강 연안에 줄지어 거주하여 부락이 갈수록 늘어났다. 누차 유시하여 멀리 물리치라고 했는데도 도리어 가증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니, 이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훗날 계책을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실로 그렇지 않다면 어찌 차마 우리 백성들을 몰아 위험한 지역으로 내보내겠는가. 경들은 사졸들과 더불어 나의 뜻을 잘 새기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지방에게 모의(毛衣), 궁시(弓矢), 고건(櫜鞬)을 하사하였다. ○ 강원도의 전지(田地)를 측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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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보 자료 ※ 이지방(李之芳) 1466~1537 자는 자화. 부사정공 경연(景衍)의 손자. 선무랑 증 호조참판 징(徵)의 아들. 외조부는 양천인 사인 허적(許迪). 처부는 청송인 봉사 심안신(沈安信). 1489년 무과에 급제하여 종성, 회령의 부사, 경상도 함경남도 평안도 절도사를 역임하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대동보)